페라리 디자이너는 아직 연필로 시작해요
AI가 잡일을 없애자, 신입이 일을 배우던 사다리도 사라졌어요

들어가며
구독자님, 페라리와 푸조를 디자인해온 이탈리아 스튜디오 피닌파리나에는 신입 디자이너에게 적용되는 규칙이 하나 있어요. 새 차를 구상할 때 반드시 연필로 시작할 것. AI로 렌더링 200장을 뽑아낼 수 있는 시대에, 왜 굳이 손 스케치를 고집할까요.
이번 주 파이낸셜타임스가 이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답을 내놨어요. AI가 신입의 일자리를 없애는 게 아니라, 신입이 일을 배우던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거예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 글로벌 기업들이 하고 있는 건 신입 채용의 재개가 아니라 ‘배움의 사다리’를 다시 짓는 공사예요. 그리고 한국은 이 공사가 가장 시급한 시장 중 하나예요.
끊겼던 사다리, 돌아온 채용
시계를 2023년으로 돌려볼게요. 하버드경영대학원 연구팀이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 758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GPT-4를 쓴 그룹은 18개의 정형화된 과업에서 12.2% 더 많은 일을 25.1% 더 빠르게 처리했어요. 그런데 AI 역량의 경계 밖에 있는 복잡한 경영 과업에서는 정답을 낼 확률이 오히려 19% 낮았고요. 연구팀은 이 들쭉날쭉한 경계를 ‘재기드 프런티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따로 있어요. AI가 가장 잘하는 쪽에 있던 일이, 하필 신입에게 주어지던 일이라는 것.
숫자로도 확인돼요.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의 브린욜프슨 연구팀이 발표한 ‘탄광 속 카나리아’ 논문에 따르면, 생성형 AI 확산 이후 AI 노출도가 높은 직군의 22~25세 고용은 상대적으로 약 13% 감소했어요. 같은 직군의 경력자 고용은 안정적이었는데 말이에요. 브린욜프슨의 표현을 빌리면, “젊은 직원이 아는 것과 LLM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겹쳐”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올해 들어 흐름이 바뀌고 있어요. 미국대학취업협회(NACE)의 2026년 봄 채용 전망에서 기업들은 올해 대졸 신입 채용을 5.6% 늘리겠다고 답했어요. 불과 반년 전 조사에서 같은 수치가 마이너스 2.4%였다는 걸 감안하면 방향이 뒤집힌 셈이에요. 다만 응답 기업이 185곳이라 표본은 크지 않고, 증가분은 직원 5천 명 이상 대기업(8.7%)에 몰려 있어요.
더 흥미로운 건 램프와 레벨리오랩스가 미국 기업 2만 1천여 곳의 지출·인력 데이터를 연결해 분석한 결과예요. AI에 가장 공격적으로 투자한 기업들이 도입 후 2년간 고용을 약 10% 늘렸고, 신입 채용은 12%나 늘렸거든요. AI를 가장 많이 쓰는 회사가 신입을 가장 많이 뽑고 있다는 뜻이에요. 물론 이건 AI가 일자리를 만든다는 증거는 아니에요. AI에 크게 투자할 만큼 잘 나가는 회사가 사람도 많이 뽑는다는 해석이 더 자연스럽죠. 연구팀도 같은 단서를 달아뒀어요.
링크드인의 아니시 라만은 이 변화를 이렇게 요약해요. “신입의 일이 잡일(grunt work)에서 진짜 일(real work)로 옮겨가는 신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채용이 돌아온 게 아니라, 다른 일자리가 새로 생기고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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