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제154호

페라리 디자이너는 아직 연필로 시작해요

AI가 잡일을 없애자, 신입이 일을 배우던 사다리도 사라졌어요

페라리 디자이너는 아직 연필로 시작해요

들어가며

구독자님, 페라리와 푸조를 디자인해온 이탈리아 스튜디오 피닌파리나에는 신입 디자이너에게 적용되는 규칙이 하나 있어요. 새 차를 구상할 때 반드시 연필로 시작할 것. AI로 렌더링 200장을 뽑아낼 수 있는 시대에, 왜 굳이 손 스케치를 고집할까요.

이번 주 파이낸셜타임스가 이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답을 내놨어요. AI가 신입의 일자리를 없애는 게 아니라, 신입이 일을 배우던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거예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 글로벌 기업들이 하고 있는 건 신입 채용의 재개가 아니라 ‘배움의 사다리’를 다시 짓는 공사예요. 그리고 한국은 이 공사가 가장 시급한 시장 중 하나예요.


끊겼던 사다리, 돌아온 채용

시계를 2023년으로 돌려볼게요. 하버드경영대학원 연구팀이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 758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GPT-4를 쓴 그룹은 18개의 정형화된 과업에서 12.2% 더 많은 일을 25.1% 더 빠르게 처리했어요. 그런데 AI 역량의 경계 밖에 있는 복잡한 경영 과업에서는 정답을 낼 확률이 오히려 19% 낮았고요. 연구팀은 이 들쭉날쭉한 경계를 ‘재기드 프런티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따로 있어요. AI가 가장 잘하는 쪽에 있던 일이, 하필 신입에게 주어지던 일이라는 것.

페라리숫자로도 확인돼요.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의 브린욜프슨 연구팀이 발표한 ‘탄광 속 카나리아’ 논문에 따르면, 생성형 AI 확산 이후 AI 노출도가 높은 직군의 22~25세 고용은 상대적으로 약 13% 감소했어요. 같은 직군의 경력자 고용은 안정적이었는데 말이에요. 브린욜프슨의 표현을 빌리면, “젊은 직원이 아는 것과 LLM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겹쳐”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올해 들어 흐름이 바뀌고 있어요. 미국대학취업협회(NACE)의 2026년 봄 채용 전망에서 기업들은 올해 대졸 신입 채용을 5.6% 늘리겠다고 답했어요. 불과 반년 전 조사에서 같은 수치가 마이너스 2.4%였다는 걸 감안하면 방향이 뒤집힌 셈이에요. 다만 응답 기업이 185곳이라 표본은 크지 않고, 증가분은 직원 5천 명 이상 대기업(8.7%)에 몰려 있어요.

더 흥미로운 건 램프와 레벨리오랩스가 미국 기업 2만 1천여 곳의 지출·인력 데이터를 연결해 분석한 결과예요. AI에 가장 공격적으로 투자한 기업들이 도입 후 2년간 고용을 약 10% 늘렸고, 신입 채용은 12%나 늘렸거든요. AI를 가장 많이 쓰는 회사가 신입을 가장 많이 뽑고 있다는 뜻이에요. 물론 이건 AI가 일자리를 만든다는 증거는 아니에요. AI에 크게 투자할 만큼 잘 나가는 회사가 사람도 많이 뽑는다는 해석이 더 자연스럽죠. 연구팀도 같은 단서를 달아뒀어요.

링크드인의 아니시 라만은 이 변화를 이렇게 요약해요. “신입의 일이 잡일(grunt work)에서 진짜 일(real work)로 옮겨가는 신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채용이 돌아온 게 아니라, 다른 일자리가 새로 생기고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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