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제169호

하버드생이 챗GPT로 번역한 소설

독서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읽는 20%와 안 읽는 80%로 갈라지고 있어요

하버드생이 챗GPT로 번역한 소설

들어가며

구독자님, 이런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볼까요. 미국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대학의 한 학생이 소설 한 권을 앞에 두고 막혔어요.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1962)였는데, 이 학생은 그 문장을 ‘고대 영어’로 착각했다고 해요. 그래서 ChatGPT에 통째로 넣어 더 쉬운 말로 ‘번역’한 다음에야 읽었어요. 하버드 학생이요.

처음 이 사례를 봤을 때 저는 그냥 한 사람의 문해력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관련 자료를 파고들수록, 이건 개인의 실력이 아니라 ‘읽기’라는 행위 자체가 사회에서 갈라지고 있다는 신호였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독서는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읽는 소수와 읽지 않는 다수로 양극화하는 중이에요. 오늘은 그 균열의 정체를 하나씩 뜯어볼게요.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숫자부터 볼게요. 미국예술기금(NEA)의 조사에 따르면, 2022년에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은 절반이 안 됐어요. 소설이나 단편을 읽은 사람은 38%에 그쳤고요. 미국인의 시간 사용 기록 23만 6천 건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하루 중 취미로 책을 읽는 사람의 비율이 2004년 28%에서 2023년 16%로 떨어졌어요. 참고로 작년에 미국인의 57%가 어떤 형태로든 도박에 돈을 걸었어요. 이제 책을 읽는 것보다 베팅을 하는 게 더 흔한 여가가 된 셈이에요.

읽는 책도 단순해지고 있어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의 문장은 100년 전보다 약 3분의 1 짧아졌어요. 1958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였어요. 길고 복잡한 문장으로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작품이죠. 반면 작년 판매 1위는 청소년 시리즈 『헝거게임』의 신작이었어요. 두 작품의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그 사이에 무엇이 빠졌는지가 보여요.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어요. 미국은 글을 못 읽는 나라(문맹)가 된 게 아니에요. UCLA의 인지신경과학자 마리안 울프는 사람들이 개별 단어를 해독하는 능력이 아니라, 긴 글을 붙잡고 깊이 이해하고 종합하는 고차원 능력을 잃고 있다고 봐요. 이걸 ‘포스트리터러시’1라고 불러요. 이메일, 문자, 게시물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글자를 읽지만, 정작 한 편의 긴 글에 집중하는 힘은 빠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의 핵심 숫자가 하나 더 있어요. 작년에 읽힌 책의 80% 이상을, 성인의 단 20%가 읽었어요. 이 숫자를 기억해 두세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읽기는 원래 자연스러운 능력이 아니에요. 인간의 뇌에는 글자를 읽도록 설계된 회로가 따로 없어요. 말하기와 사물 인식에 쓰던 영역을 빌려서 읽는 거예요. 문자는 6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등장했고, 대중이 글을 읽게 된 건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1440년 이후예요. 인류 역사에서 ‘누구나 읽는’ 시대는 생각보다 짧은 예외였던 셈이에요.

그런데 그 짧은 시대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통째로 바꿨어요. 미디어 이론가 월터 옹은 1982년 책에서, 글쓰기가 논리적이고 선형적인 사고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봤어요. 신경심리학자 루리아의 실험이 유명해요. 1930년대 우즈베키스탄의 문맹 농민들에게 “북극의 곰은 모두 희다. 노바야제믈랴는 북극에 있다. 그럼 그곳의 곰은 무슨 색인가?”라고 물었어요. 글을 배운 농민은 삼단논법을 풀었지만, 문맹 농민은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며 답을 거부했어요. 문자를 익힌다는 건 단어를 읽는 걸 넘어, 추상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얻는 일이었던 거예요.

문제는 그 읽는 시간을 다른 매체가 차례로 빼앗아 갔다는 거예요. 텔레비전이 먼저였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결정타였어요. 매클루언은 이미 1962년에 서구가 ‘포스트리터러시’ 시대로 갈 거라고 예언했고, 포스트먼은 1985년 『죽도록 즐기기』에서 TV가 공론장을 오락으로 바꿨다고 경고했어요. 지금은 상황이 더 심해요. 넷플릭스가 작가들에게 “시청자는 화면을 제대로 안 보고 있다고 가정하고, 줄거리를 계속 다시 설명하라”고 주문했다는 보도까지 나왔어요.

학교는 이 흐름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겼어요. 2025년 조사에서 미국 중·고교 영어 교사 대부분이 1년에 0~4권만 책을 배정한다고 답했어요. 시험이 짧은 지문 위주로 바뀌면서, 수업도 책 한 권 대신 발췌문 훈련으로 옮겨간 거예요. 교실엔 디지털 기기가 넘쳐나고요. 그 사이 짧은 영상이 모든 걸 지배하게 됐어요. 심리학자 진 트웬지의 분석을 보면, 8학년(중2 무렵) 아이는 하루 평균 4시간 반을 SNS에 써요. 그것도 상당 시간을 2배속 영상으로요.

이게 뇌에 남긴 흔적은 뚜렷해요. 화면에서의 평균 주의 지속 시간이 2004년 2분 30초에서, 2012년 75초, 최근엔 약 47초로 줄었어요. 소아과 전문의 존 허튼이 3~5세 아이들의 뇌를 촬영해 보니, 애니메이션 영상을 볼 때는 정지 그림에 오디오를 들려줄 때보다 상상을 담당하는 영역을 절반만 썼어요. 화면이 대신 다 해 주니 뇌가 일을 덜 하는 거예요. 세대가 갈수록 IQ가 오르던 ‘플린 효과’2가 최근 20년 사이 여러 나라에서 멈추거나 역전됐다는 연구도 나왔어요.

여기에 AI라는 새 변수가 얹혔어요. 지금까지의 기술이 읽기를 방해했다면, 생성형 AI는 쓰기 자체를 위협하는 첫 도구예요. 조지타운대의 칼 뉴포트는 글쓰기가 곧 사고라고 말해요. 생각을 문장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어설픈 논리가 드러나고, 새로운 연결이 생겨요. 그런데 AI가 그 수고를 대신하면, 편해지는 대신 배움도 함께 사라져요. 브라질에서 AI로 공부한 학부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시험 점수가 유의미하게 낮았고, 영국의 한 연구에서는 잦은 AI 사용이 비판적 사고력과 음의 상관을 보였어요.

역사가 주는 힌트가 하나 있어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흔히 큰불에 타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진짜 원인을 ‘방치’로 봐요. 습기와 벌레가 파피루스를 갉아먹는 동안, 필사하고 지킬 의지가 먼저 꺼졌던 거예요. 고전학자 로저 배그널의 말이 서늘해요. 도서관이 죽도록 내버려 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암흑기가 도착했다는 증거라고요. 오늘의 위협도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조용한 무관심의 얼굴을 하고 있어요.

🔑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사고방식이 뒤로 물러나요. 옹은 문자 사회가 다시 말 중심 문화의 습관으로 돌아가는 걸 ‘2차 구술성’3이라고 불렀어요. 구술 문화는 기억을 돕기 위해 반복과 별명, 감정과 갈등을 앞세워요. 모순에 무감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사실보다 중요해져요.

이건 정치와도 이어져요. 미디어 이론가 조슈아 메이로위츠는 1985년에, 전자 매체가 지도자를 고르는 기준을 ‘이력서’에서 ‘데이트 상대’로 바꾼다고 봤어요. 잘 쓰고 잘 따지는 사람보다, 화면에서 좋아 보이는 사람이 유리해지는 거죠. 알고리즘은 복잡함이나 미묘한 차이 대신 단순하고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콘텐츠에 보상을 줘요. 원문 기사는 이 구조의 사례로 트럼프 대통령을 들어요. 다만 저는 이걸 특정 인물의 문제라기보다 미디어 구조의 문제로 읽는 게 더 정확하다고 봐요. 기사도 인정하듯, 짧은 영상과 알고리즘을 활용하는 정치는 좌와 우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둘째, 읽기가 계층을 가르는 표지가 돼요. 앞에서 기억해 두라던 숫자, 성인의 20%가 책의 80%를 읽는다는 그 데이터예요. 이제 책을 들고 다니는 행위는 하나의 ‘정체성 선언’처럼 읽혀요. 오죽하면 온라인에선 ‘과시적 독서’라는 조롱까지 생겼어요. 럿거스대의 독서사 연구자 리아 프라이스는 독서가 ‘우표 수집이나 난초 기르기 같은 틈새 취미’가 되고 있다고 말해요.

셋째, 문화의 권력이 이동해요. 신문사 고용은 지난 20년간 75% 줄었고, 인문학 학위는 급감했어요. 대신 문화의 중심은 스트리머와 팟캐스터, 인플루언서에게로 옮겨갔어요. 조 로건의 청취자 규모는 웬만한 언론이 꿈도 못 꿀 수준이고요.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지식이 예전엔 윗세대에서 아랫세대로 세로로 전해졌다면, 이제는 또래에서 또래로 가로로 흘러요. Z세대의 약 60%가 가능하다면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다고 답했어요.

물론 반대편 이야기도 공평하게 놓을게요. 사실 모든 시대가 새 매체를 향해 비슷한 걱정을 했어요. 1900년에도 애틀랜틱은 ‘신문이 책을 밀어낸다’며 한탄했고, 제퍼슨은 소설이 사람을 망친다고 봤어요. 지금도 종이책 판매는 10년 전보다 늘었고, 서점이 새로 문을 열고, 서브스택과 오디오북은 성장하고 있어요.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한 뒤 댈러스의 한 교육구는 도서관 대출이 25% 가까이 늘기도 했어요. 다만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어요. 오랫동안 ‘종말론은 늘 틀렸다’고 말해 온 하버드의 비교문학 교수 마틴 푸크너조차, 이번엔 텍스트로 돌아가기 어려워 보인다고 인정했다는 점이에요.


오스왈드의 시선

솔직히 말하면, 저는 ‘독서의 종말’이라는 제목이 절반만 맞다고 봐요. 데이터를 뜯어보면 이건 소멸이 아니라 양극화예요. 20%가 80%를 읽는 구조는 전형적인 파레토 분포4이고, 그 격차는 지금도 벌어지고 있어요.

시장 진입 전략을 짜 오면서 제가 반복해서 목격한 패턴이 하나 있어요. 어떤 행동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는 순간, 그 시장은 거의 예외 없이 둘로 갈라져요. 소수의 고강도 코어와, 다수의 수동적 대중으로요. 운동이 그랬고, 요리가 그랬고, 이제 독서가 그 길을 가고 있어요.

그래서 진짜 질문은 “독서가 살아남을까”가 아니에요. “누가 계속 읽는 20%로 남고, 그 소수는 어떤 힘을 갖게 되나”예요. 여기에 반전이 있어요. AI 시대엔 깊이 읽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더 희귀해지고(공급이 줄고), 동시에 더 비싸져요(가치가 오르고). 뉴포트의 말대로, 깊은 사고는 드물어질수록 더 중요해져요. AI가 아무리 매끄러운 글을 쏟아내도, 무엇이 옳은지 가려내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은 결국 사람의 몫으로 남아요. 그게 읽는 20%가 쥐게 될 마지막 프리미엄이에요.

한 가지는 정직하게 덧붙일게요. 이 모든 걸 ‘문명의 종말’처럼 받아들이는 건 저도 조심스러워요. 100년 전에도 신문이 책을 죽인다고 했으니까요. 다만 회의론자마저 이번엔 다르다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큼은, 쉽게 넘기기 어려워요.


마치며

오늘 이야기를 세 줄로 정리할게요. 첫째, 독서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읽는 20%와 읽지 않는 80%로 갈라지고 있어요. 둘째, 그 균열은 우리의 사고와 정치, 경제의 지형을 조용히 다시 그리고 있어요. 셋째, AI 시대일수록 깊이 읽는 능력은 희귀하고 비싼 자산이 돼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불타서 사라진 게 아니라, 아무도 지키지 않아서 사라졌어요. 오늘 우리가 마주한 위협도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조용한 무관심일지 몰라요. 다행히 그 도서관과 달리, 우리의 책은 사라지지 않아요. 다만 읽을지 말지는 온전히 우리에게 달렸어요.

최근 6개월 동안 끝까지 읽은 책이 있다면 그 제목을, 없다면 ‘왜 손이 안 갔는지’를 댓글로 남겨 주세요. 다음 호에서 독자분들이 ‘멈춘 지점’의 공통 패턴을 모아 함께 분석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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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더 읽기

핵심 출처

  • The Atlantic, “The End of Reading Is Here”, 2026. : 오늘 뉴스레터의 원본 기사예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출발해 AI로 끝나는 구성이 인상적이에요.

배경 지식

  •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Orality and Literacy), 1982. : 문자가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바꿨는지, ‘2차 구술성’ 개념이 여기서 나와요.
  • 닐 포스트먼,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 1985. : TV가 공론장을 오락으로 바꾼 과정을 다뤄요. 지금 읽으면 스마트폰 이야기처럼 읽혀요.
  • 마셜 매클루언, 『구텐베르크 은하계』(The Gutenberg Galaxy), 1962. : ‘포스트리터러시’라는 말을 처음 꺼낸 책이에요.
  • 조슈아 메이로위츠, 『장소감의 상실』(No Sense of Place), 1985. : 전자 매체가 정치 리더십의 기준을 어떻게 바꾸는지 짚어요.
  • 플라톤, 『파이드로스』(Phaedrus). : 소크라테스가 “문자가 기억을 망친다”고 걱정하는 대목이 있어요. 2,400년 전 버전의 같은 논쟁이에요.

📝 용어 설명

필자 안광섭은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자 OBF(Oswarld Boutique Consulting Firm) 리드 컨설턴트이다. 대학에서 경영데이터 관리, 비즈니스 애널리틱스 등 통계 및 데이터 분석을 가르치는 한편, 현장에서는 GTM 전략과 인공지능 전략 컨설팅을 이끌며 기술과 비즈니스의 접점을 설계하고 있다. AI 대화 시스템의 기억 아키텍처(HEMA) 연구로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매일 글로벌 AI 논문을 큐레이션하는 Daily Arxiv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기술경영전문대 석사과정와 KMBA을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 《생각을 맡기는 사람들: 호모 브레인리스》가 있다.

각주

  1. 포스트리터러시(postliterate): 글을 못 읽는 상태가 아니라, 읽을 줄은 알지만 긴 글을 깊이 이해하고 종합하는 힘이 약해진 상태예요. 문맹의 반대가 아니라 ‘문해 그다음’ 단계라는 뜻이에요.

  2. 플린 효과(Flynn effect): 세대가 지날수록 평균 IQ가 꾸준히 오르던 현상이에요. 그런데 최근 20년 사이 여러 나라에서 이 상승이 멈추거나 거꾸로 돌아섰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어요.

  3. 2차 구술성(secondary orality): 문자 문화를 거친 사회가 다시 말 중심 문화의 습관(반복, 감정, 즉흥)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이에요. 옹이 방송과 전자 매체 시대를 설명하려고 만든 개념이에요.

  4. 파레토 분포(멱법칙): 소수가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쏠림 구조예요. ‘20%가 80%를 읽는다’가 딱 그 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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